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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발발 50주년을 앞두고 특집 다큐멘터리 10부작을 KBS에서 방송하고 있다.
현대사에 대해 소홀하기 그지없고 왜곡하기 바쁜 MB 정부 하에서 이런 다큐멘터리를 방송한다는게 좀 의외긴 하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 북한과 소련이 나쁜 놈이다 라는 식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는 내용이기에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여튼 요즘 현대사에 대해 제대로 공부할 기회가 많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평소 현대사에 관심이 많았던 나에게 새로운 것은 없는 내용이긴 하지만 현대사를 좀더 바르고 체계적으로 많은 사람이 알기를 바라는 마음에 한편씩 주요 내용을 정리해볼까 한다.


20세기 세계정세에 큰 영향을 끼친 4개의 국가... 바로 미국과 소련, 독일과 일본.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과 주축국으로 맞붙은 이 4개국가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파시즘과 군국주의로 세계에서 헤게모니를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접전을 펼치고 있었다. 서로 힘을 키우던 이들은 전쟁을 통해 그 힘을 심판받게 된다.


1941년 12월 7일... 만주와 중국대륙, 동남아를 하나씩 삼켜가던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의 미군기지를 공략했다.
2차 대전에서 후방 지원의 역할만을 수행하던 미국은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2차대전 참전을 선언하고 태평양 전쟁을 시작한다. 개전 초기 일본의 기습에 고전하던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를 기점으로 승기를 잡기 시작하며 점차 일본의 목을 조여갔다.


폴란드를 침략하고 프랑스를 점령하며 유럽에서 승승장구하던 독일은 소련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1942년 여름부터 이듬해 2월까지 진행된 스탈린그란드 전투에서 독일은 소련 공략에 실패하며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다. 이를 계기로 수세에 몰리던 연합군은 독일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스탈린이 이끄는 소련군이 점차 동유럽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영 주축 연합군은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 큰 성공을 거두며 2차 대전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1945년 2월, 흑해 연안의 얄타에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총리, 소련의 최고지도자 스탈린이 만났다.
독일의 항복이 임박한 상황에서 전후 처리를 위한 첫번째 연합국 정상의 만남이었다.
이 자리에서 3국은 독일을 연합국이 분할점령하고 다른 패전국민 식민지 피지배국에 대해서는 해당지역의 모든 정치세력을 대표할 수 있는 자들을 규합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최대한 빨리 자유선거를 실시해 자치정부를 수립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얄타 회담에서는 한국 문제도 거론됐다. 당시 태평양 전쟁의 장기화로 큰 손실을 입던 미국은 소련의 참전을 요구했다. 미국은 소련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면 러일전쟁 당시 잃었던 영토를 모두 회복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하지만 소련의 참전은 계속 지연되고 있었고 미국은 홀로 외로이 극동지역 전쟁을 계속 해야만 했다.


얄타 회담이 열린지 3개월 후 독일이 항복하며 유럽에서의 전쟁은 모두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일본뿐.
연합국 정상들은 독일의 포츠담에서 1945년 7월 26일 다시 모였다. 이들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고 전후 일본 영토의 영향권을 설정하며 한국의 독립을 사실상 인정했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루즈벨트를 대신해 미국 대통령이 된 트루먼은 태평양 전쟁에 대한 소련의 움직임을 주의깊게 살폈다. 여전히 소련은 태평양 전쟁에 대해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포츠담에서 핵무기 개발이 완료됐다는 비밀문서를 전달받은 트루먼은 소련을 배제한 채 원자폭탄을 이용해 태평양 전쟁을 단독 종결하려는 작전을 검토하게 된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의 B-29 전폭기가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을 일본의 히로시마에 투하했다.
엄청난 사상자와 재산피해를 낸 원자폭탄의 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던 일본은 원자폭탄의 충격에 항복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자폭탄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소련이 참전을 선언하고 한반도로 진격하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나진 웅기 등 두만강 일대 도시를 점령한 소련. 태평양 전쟁 참여를 유도하고 홋카이도 북쪽의 영토만을 내준 후 일본과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려던 미국의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기 시작한다. 미군은 아직 한반도에서 1,000km나 떨어진 오키나와에 머물러 있었다.


다급해진 미국은 새로운 전략을 설정한다. 한반도를 전면 점령하려던 계획을 수정, 북위 38도선을 기점으로 하여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점령하기로 한 것. 미국에 비해 참전도 늦었고 참전만 하면 홋카이도 북쪽의 잃었던 영토를 찾을 수 있던 소련은 한반도를 절반만 점령하는 것으로도 잃을 것이 없는 상황. 소련은 미국의 이와 같은 제안을 수락하며 한반도에 처음 38선이라는게 등장하게 된다.

결국 몰락한 사회주의가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지 못한 점이 남쪽 사람들에게는 다행일지도 모르겠지만 이후 벌어진 분단의 아픔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피할 수 없었음은 심히 안타깝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항복하며 한반도에는 해방의 기운이 찾아온다.
한반도 북쪽에서는 소련군이 점령군 자격으로 진주를 시작했다. 해방의 기쁨에 취한 사람들은 소련군을 열렬히 환영했다. 소련군은 이런 북한 사람들의 환영 태도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오키나와에 있던 미군은 해방후 3주가 지나서야 한반도로 진주했다.
민중과 어느정도 교감이 되어있던 소련군과는 달리, 미군은 조선인들과 대립각을 세우며 해방을 준비하던 세력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기존의 총독부 세력을 이용해 한반도 수습에 나선다.

한반도의 전체적인 상황과 조선인들의 정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미군의 실책중 하나였다. 특히나 점령 초기 조선총독부 세력의 보고서에 의한 정세 파악과 그들을 지나치게 활용한 점은 아직까지 친일파 문제와 같은 일제 통치의 잔재를 깨끗하게 해결하지 못하는 계기가 되고 만다. 남한의 중심 서울에 총독부가 있던 것도 하나의 원인이지 않을까... 만일 총독부가 평양에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해방정국을 맞이하며 독립을 위해 활동하던 인사들이 속속들이 한반도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일본 항복 직전부터 전후 한반도 수습에 대한 제안을 받았던 몽양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해방정부 수립을 위한 기초를 닦기 시작했지만 미 군정은 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다음은 이승만... 미국과 가장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그는 당시 독립운동 관련 인사중 가장 국제정세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미국 정부는 한반도 정부 수립의 중심에 그를 세우려 했다.

그리고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세력... 자체적으로 몇십년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해온 그들은 해방정부의 정통성과 가장 근접한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미군은 이들의 존재를 껄끄러워 했다. 결국 임시정부는 미국의 인정도 받지 못한채 개인 자격으로 어렵게 한반도 땅을 밟아야 했다.

북한에서는 소련군 진주 당시 민족주의자 조만식 선생이 지도자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소련의 정책에 우호적이지 않았던 조만식은 해방정부 수립과정에서 완전히 배제당하게 되고 소련은 그 대안으로 동북항일연군 출신의 소련군 장교 김일성을 내세운다.


빠른 속도로 38선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은 빠른 속도로 개혁에 착수한다.
무상몰수 무상배분의 토지개혁을 한달도 안되서 완료한 후 산업 전 분야에 대한 국유화까지 속전속결로 달성해 단시간에 통치의 기반을 닦는데 성공한다. 남한에 비해 남아 있는 일본 세력이 적고 사회주의 특유의 속도감까지 더해 북한은 빠르게 해방체제를 갖추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직도 총독부 세력을 비롯한 일재 잔재세력이 남아있고 북한의 개혁으로 인해 삶의 기반을 잃은 이북 사람들의 월남, 외국에 흩어져 있던 동포들의 귀환이 겹쳐 있던 서울은 혼란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인구는 급격히 늘어나고 생필품은 부족해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올랐다. 게다가 민주주의 특유의(?) 자유분방함은 남한 사회가 중심을 잡는데 더욱 어려움을 겪게 만들었다.

1945년 12월, 미영소 3국의 외무장관은 한국의 처리방침을 확정한다.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립해 남북의 여러 정치단체들과 협의를 거쳐 해방정부를 수립하도록 유도하고, 해방정부 수립을 위한 기반이 닦이기 전까지 연합국이 일정기간 한반도를 신탁통치 하는 것을 검토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남한의 언론은 이러한 합의사항 중 일부만을 부풀려 보도했다. 연합국이 한반도를 신탁통치 한다는 사실만을 보도한 것. 전국은 반탁과 찬탁의 물결로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좌익 세력은 모스크바 회의의 결정이 나름대로의 합리성을 갖고 있으며 이를 지지하라는 소련의 요구도 있었기에 찬탁의 입장을, 우익 세력은 신문에 보도된 신탁통치에 대한 기본적인 반감과 우익을 대표하는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위협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신탁통치를 반대했다.


이런 극한의 대립 속에서 약속한 대로 미소 공동위원회가 한반도 해방정부 수립을 위해 개최됐다.
그러나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세력을 정부수립 과정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소련의 입장과 신탁통치 찬반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단체가 정부 수립에 관여해야 한다는 미국의 입장이 팽팽하게 충돌하며 미소공위는 합의점을 찾는데 실패한다. 1946년 3월 1차회의, 1947년 5월 2차회의만을 치루고 미소 공동위원회는 그 임무를 다한다.


한반도에서도 좌우간의 대립이 계속되는 가운데 세계 정세도 점차 악화기로를 걷고 있었다.
동유럽에서는 소련이 공산화의 손길을 뻗쳐갔고, 이를 두려워한 미국은 1947년 '트루먼 독트린' 을 발표했다. 공산주의 세력의 확대를 방지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는 것. 바로 '냉전 시대' 의 개막을 알리는 폭탄선언이었다.

당연히 한반도에서도 미국과 소련이 합심해 해방정부를 세우기 어려워졌다. 이제부터 미소는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반도 분단의 징조가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이어서 미국은 유엔에 한반도 문제를 상정하게 된다. 소련보다는 자신들에게 좀더 우호적인 유엔의 분위기를 이용해 한반도에 친미 정부 수립을 하겠다는 의도. 1947년 11월 유엔 소총회 결의에 따라 인구비례에 따른 남북한 총선거 실시를 통한 해방정부 수립, 선거과정을 관리 감독하기 위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파견이 결의된다.

남한에서 한국임시위원단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만 북한은 이들의 입국을 거부한다. 이미 어느정도 소련의 영향하에 남한보다 빨리 단독정부 기반을 갖췄고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거가 실시되면 불리한 입장에 놓일께 뻔한 상황. 결국 반쪽자리 임시위원단은 고민을 거듭한 끝에 총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해 정부를 수립하자는 결론을 내내놓는다. 한반도의 분단이 기정사실화 되는 순간이었다.

 
남북의 분단을 끝까지 막아보려고 했던 김구와 김규식 등의 세력은 마지막으로 북한을 설득하기 위해 김일성이 주최한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다. 하지만 분단으로 가는 흐름을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다. 그리고 자체적으로 좌우합작을 통한 단독정부 수립을 하기엔 우리 자체의 힘도 약했다. 이미 소련과 미국의 영향력이 커진 상황에서 이들의 시도는 효과를 발휘할 수 없었다. 결국 서로간의 희망사항만을 확인한 채 연석회의는 마무리됐다.


일본과의 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연합군이 한반도 분할점령을 위해 그었던 38도선...
단순한 경계선에 불과했던 이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동서냉전과 좌우 대립의 상징으로 변화하기 시작했고 한반도에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아있게 되는데...

Posted by 베이(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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