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42024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38선 체제가 공고화 되면서 남북은 제각의 행보를 시작한다.
해방후 남한보다 빨리 체제 안정화를 이룬 북한. 미소의 한반도 처리방침이 확정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1946년 11월에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하고 1년후인 1947년 11월에는 헌법제정위원회를 설치하며 정부 수립의 기틀을 다진다.

풍부한 지하자원과 일본이 남기고 간 각종 산업시설로 인해 북한 경제는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정치 경제적인 안정을 이룬 북한은 1948년 2월 조선인민군 창설까지 달성해 남한을 앞서갔다.


안정된 북한에 비해 남한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유엔의 남한 단독 총선거 실시 결정에 따라 분단의 공고화를 반대하는 세력과 현실을 인정하자는 세력간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5.10 총선거를 한달 앞둔 1948년 4월 3일에는 제주 사태가 발생했다.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좌익 단체에 대한 탄압에 불만을 품은 남로당 세력이 무력충돌을 일으킨 것. 무고한 양민이 이 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고 제주도가 계속 혼란에 빠지는 등 바람잘날이 없었다.

그런 위기 속에서도 5.10 총선거는 예정대로 잘 치러졌고 5월 31일에 제헌국회가 출범하였다.


5.10 총선거를 계기로 남북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북 공식 수립되었고 9월 9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선포식이 열려 한반도에 2개 정부가 생겼다.

북한은 그동안 남한과 같이 써오던 태극기를 버리고 새롭게 인공기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정부는 단순히 2개의 정부라는 의미 외에도 모두 서울을 수도로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미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존재하고 있었다.


1948년 2월 조선인민군이 이미 창설된데 반해 남한의 군 조직은 1946년 창설된 국방경비대 조직이 전부였다.
국방경비대는 정식 군대라기 보다는 경찰과 군대의 중간 성격 조직에 불과했다. 게다가 예산 지원도 충분하지 못해 일본군이 버리고 간 군복과 장비를 사용해야만 했다.

정부 수립후 한국군 조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지만 급하게 이뤄지다보니 선발 과정도 꼼꼼하게 진행되지 못했고 사상 검증 등의 절차도 이뤄지지 않았다. 온갖 사람들이 군대로 몰렸는데 그중에서 남한의 탄압으로 활동 반경을 잃은 좌익세력의 입대가 많았다.

이것은 큰 불씨가 됐다. 결국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이 발생한다. 제주사태를 진압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거부하고 14연대 내 좌익세력이 반란을 일으킨 것. 사태는 조기에 진압됐지만 남한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반공 교육을 강화하고 좌익세력에 대한 견제를 강화한다. 남아있던 좌익 세력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펼치거나 월북한다.

이와 같이 남북간, 남한 내부에서도 발생하는 좌우간의 대립은 안타까운 분단의 현실에서 좌우가 공존하기 힘들며 더 큰 갈등을 유발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1948년 10월 소련군이 철수하고 1949년 6월 미군이 철수하며 미소가 그어놓은 38선에는 남북이 대치를 하게 되었다.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채 그어진 38선으로 인해 많은 군사적 충돌이 일어났고 전략적 요충지에 대한 기득권을 확보하려는 서로간의 대결은 계속됐다.

남한은 38선의 군사적 충돌을 통해 북한 정부에게 북진 통일의 의지를 보여주려고 했고, 미국에는 군사적 원조를 받아 군사력을 강화하려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 정부의 태도는 한국이 단독 전쟁을 일으키지 모른다는 미국의 우려로 인해 오히려 남한의 군사력 보강을 더디게 하는 역효과를 낳고 말았다.


1950년 1월,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은 극동방위선인 '애치슨 라인' 을 발표한다.
그러나 이 방위선에는 한국과 대만이 제외됐다. 이 지역에서 발생하는 소요에 대해서 미국이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미.
이전부터 남한을 해방하고 통일을 이뤄야 겠단 생각을 갖고 있던 김일성에게 이 애치슨 라인은 전쟁에 대한 욕망을 불타오르게 하는 계기가 됐다.


이전부터 남한을 전쟁으로 제압하자는 김일성의 제안을 스탈린은 거절해왔다.
전면전 확대에 대한 부담이 있었고 남북 전쟁 발발시 미국의 개입 정도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소련은 미국보다 핵무기 개발도 늦은 상태였기 때문에 군사력의 우위도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김일성은 끊임없이 전쟁을 제안해왔고 스탈린은 군사적, 경제적 원조 등을 통해 그를 달래왔다.

1949년 중국 내전이 마무리되며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했고, 애치슨 라인의 발표로 미국이 한국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선 스탈린은 중국의 마오쩌둥과 협의한 후 김일성의 전쟁 계획을 승인한다.

이제 포성이 울릴 날만이 남아 있었다. 
Posted by 베이(BAY)
|